16살 여배우와 결혼한 46세 男…1년 만에 이혼한 이유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3-10-28 11:03   수정 2023-10-28 11:46



1864년 2월 20일 토요일, 영국 런던에 있는 성 바나바스 교회에서 46살의 유명 화가와 16살 여배우의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아마도 난리가 날 겁니다. 무엇보다도 신부가 미성년자이니, 도덕적인 지탄을 받는 건 물론 법적인 문제도 생길 테니까요. 하지만 당시 이 결혼은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때 영국에서는 이런 결혼이 흔했거든요.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줄리엣 나이가 만 13세였다는 걸 생각하면 쉽습니다.

두 남녀는 달콤한 꿈에 젖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천재 화가의 아내가 될 생각에 행복했습니다. 당시 배우는 사회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는 직업이 아니었고 근로 조건도 열악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으로 그녀는 ‘천재 화가의 뮤즈’가 돼 명예롭고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을 터였습니다. 화가도 행복했습니다. 그림 실력도 인품도 훌륭했던 그였지만, 사랑에는 영 젬병이라 이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런 그가 살짝 늦긴 했어도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게 되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겠지요.

하지만 이들 앞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남자가 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이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오늘은 ‘영국의 미켈란젤로’라 불리며 19세기부터 20세기 초입까지 전 세계적인 존경을 받았던 거장, 조지 프레드릭 와츠(1817~1904)의 예술과 사랑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자수성가한 흙수저
와츠는 조금 내성적이고 서툰 면이 있지만 속이 깊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늘 성실했습니다. 쉽게 말해 ‘진국’이었습니다. 이런 성격은 그의 어린 시절 만들어졌습니다.

와츠의 아버지는 악기를 만드는 장인이었습니다. 예술에 대한 소양이 깊고 세련된 사람이었지요. 아들이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과 똑같은 날(2월 23일) 태어나자 아들에게 조지 프레드릭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장사 수완이 부족하다는 것. 그래서 집은 가난했습니다. 게다가 와츠가 여섯살 때 세 명의 형제가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고, 3년 뒤엔 어머니마저 같은 병으로 잃는 비극이 덮쳤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와츠는 내향적이고 진지한 성격이 됐습니다.

돈은 잘 벌지 못했어도 예술적 감각이 있었던 아버지는 어린 와츠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열 살이 된 와츠를 자신이 아는 조각가의 스튜디오에 보내 공부시켰지요. 와츠는 그곳에서 일을 도우며 미술 공부를 했고,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가져온 대리석 부조 조각들을 보며 감각을 키웠습니다.


와츠는 금세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17살 때 꽤 괜찮은 자화상을 그려서 스승에게 칭찬받았지요. 하나 남은 아들이 그림을 잘 그리는 게 너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던지, 아버지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손을 잡고 왕립예술원 원장을 찾아가 작품을 보여줬지요.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실망스러웠습니다. “나쁘진 않은데 아드님이 굳이 예술가가 될 필요가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와츠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커녕 더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밤마다 다음날 입고 나갈 옷을 갖춰 입고 바닥에서 잔 것도 아침에 그림 그리러 나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긴 하지만, 때로 젊은 사람들은 좀 미련한 짓을 하면서 각오를 다지곤 하지요. 이런 마음가짐 덕분이었는지 실력은 일취월장했습니다. 이듬해 와츠는 18세의 나이로 왕립예술원에 입학하는 데 성공합니다.


스무 살 때인 1837년부터 와츠는 본격적으로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와츠의 실력과 성실함을 눈여겨본 그리스 출신의 부자가 그를 후원한 게 계기였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대강 해결되면서 와츠도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습니다. 1843년 꽤 큰 상을 받았고, 상금으로 받은 300파운드(지금 한국 돈으로 2700만원가량)를 활용해 4년간 이탈리아 등지로 미술 유학도 다녀왔습니다. 30대에 들어선 와츠는 어느덧 영국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화가가 돼 있었습니다.
예술은 알아도 사랑은 몰라


1850년, 서른세 살의 와츠는 자기 인생의 주요 무대 중 한 곳에 도착했습니다. 17개의 침대가 있는 호화 주택인 ‘리틀 홀랜드 하우스’에 살게 된 겁니다. 당시 이곳의 주인은 고위 공직자였던 헨리 토비 프린셉과 그의 아내 사라. 예술 애호가였던 이들 부부는 며칠 머물다 가라며 와츠를 초대했는데, 와츠의 인간적인 매력과 예술에 푹 빠져버려서 “그냥 같이 살면서 작업을 하라”고 제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년 전 아버지를 잃고 혼자 살던 와츠도 이곳이 마음에 들었기에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지요.

리틀 홀랜드 하우스는 당시 런던 예술계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떠들썩하지만 집에 갈 때는 허무한 일반적인 사교 모임과 달리, 일요일 오후마다 열리는 리틀 홀랜드 하우스의 살롱에서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이 진지한 토론과 인간적인 교류를 나눴습니다. “3일만 머물다 가려고 와서 30년을 머물러 버렸다.” 훗날 와츠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에서 와츠는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그렸고, 좋은 친구도 많이 사귀었습니다.

하지만 연애만큼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요즘 말로 ‘썸’은 몇 번 탔지만,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했습니다. 여주인의 친척이자 살롱의 단골 손님이었던 버지니아 패틀과의 관계가 그랬습니다. 버지니아는 당시 살롱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미모도 미모였지만 교양과 매력이 아주 뛰어났지요. 한 화가는 그에 대해 “손끝까지 예술적이었고, 예술을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와츠의 인품과 실력을 알아본 것도 당연했습니다. 그녀는 항상 와츠를 격려했고, 인간적인 호감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와츠도 버지니아를 연모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아니라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것뿐이야. 그녀는 귀족이고, 나는 서민 출신인걸. 내 사랑을 얘기해봤자 비웃음만 당할 게 뻔해.’ 대신 와츠는 버지니아의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사랑이 담긴 탓에 와츠가 그린 버지니아의 그림은 보는 이들을 확 끌어당겼습니다. 와츠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가 서랍장 위에 걸린 버지니아의 초상화를 보고 홀딱 반한 귀족(서머스 백작)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서머스 백작은 수소문 끝에 버지니아를 만날 수 있었고, 얼마 되지 않아 그녀에게 청혼했습니다. 와츠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던 버지니아는 청혼을 수락했습니다. 와츠는 짝사랑하던 여인을 자신이 그린 그림 때문에 빼앗긴 셈입니다.

버지니아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를 반하게 했던 붓은 와츠의 붓뿐이다. 그에 비하면 다른 모든 붓은 신발 닦는 솔처럼 느껴졌다.” 한편 1910년 버지니아의 부고 기사에도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와츠의 그림은 그녀의 매력을 더했다. 그런 위대한 아름다움은 세상에 주는 선물이다.”
30세 연하와 결혼한 아저씨
와츠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돈도 많이 벌어서 꽤 부자가 됐습니다. 인품도 훌륭해서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모두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를 좋아한다는 여성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연애는 여전히 잘되지 않았습니다. 운이 따르지 않았고, 자신의 매력을 잘 보여주지 못하는 서툰 성격 탓도 있었습니다. 39세 때인 1856년 와츠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결혼할 가능성보다는 차라리 중국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겠어.” 그렇게 세월이 흘러 1863년이 됐고, 와츠도 46세가 되었습니다. 결혼은 거의 포기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이 갑자기 찾아와 그를 들이받았습니다. 어느 봄날 살롱에 초대된 테리 가족. 전국을 돌며 연극을 해서 먹고살던 이 가족에는 어릴 때부터 배우로 훈련받은 딸이 두 명 있었습니다. 둘 다 아름다웠고 당시 런던 연극계의 스타로 떠오르고 있었지만, 특히 둘째 딸 엘런의 톡톡 튀는 매력이 와츠를 사로잡았습니다. 와츠는 홀린 듯 엘런의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엘런도 와츠가 자신을 그리는 게 좋았습니다. 멋지고 고상한 리틀 홀랜드 하우스의 분위기, 아름다운 정원과 스튜디오, 조용한 목소리와 우아한 예절을 갖춘 온화하고 예술적인 사람들…. 다소 거칠고 열악한 극장의 분위기에 익숙하던 그녀에게, 살롱에서 와츠의 그림 모델이 되는 건 꿈만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자연히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끌렸습니다. 와츠는 엘런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의 얼굴, 머리카락, 피아노를 치는 모습, 인사하는 모습 등을 낭만적이면서도 섬세하게 그렸습니다. 엘런은 그 작품에 감탄하며 몇 시간이고 와츠의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아껴주고 싶다’는 마음이었지만, 와츠는 자신이 엘런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됐습니다. 엘런이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도 와츠에게는 매력으로 느껴졌습니다. 와츠가 이때까지 연애 감정을 나눴던 사람들을 비롯해 그가 아는 대부분의 여성은 귀족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마침내 자신의 신분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가 찾아온 것입니다. 엘런도 와츠에게 사랑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와츠는 용기를 내 엘런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엘런의 아버지와 와츠는 동갑. ‘이거 뭐 하는 놈이야?’ 처음엔 이런 생각이 들긴 했겠지요. 하지만 따져보면 나쁜 제안은 아니었습니다. 서른 살의 나이 차이가 크긴 하지만, 당시 이런 결혼은 그리 드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상대는 돈도 많고 인품도 훌륭한, 나이를 빼면 흠잡을 데 없는 유명인. 결국 결혼은 별문제 없이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나이 차이와 성격 차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집주인의 아내 사라였습니다. 잠깐 머무는 손님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평민 출신의 못 배운 어린 여자애’가 같은 집에 사는 게 갈수록 사라의 마음에 거슬렸던 겁니다. “머리가 그게 뭐니?” “너는 아는 게 없으니 손님들이 오면 아무 말도 하지 마.” 커리어를 모두 포기하고 결혼했는데, 졸지에 지독한 시집살이가 시작된 겁니다.

와츠가 화끈하게 엘런의 편을 들어 주고 나가서 따로 집을 구하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러질 못했습니다. 사정은 있었습니다. 이때까지 집주인 부부에게 입은 은혜가 있을뿐더러, 집주인에게 밉보이면 자신의 사회적·예술적 기반인 살롱 사람들에게 완전히 소외될 게 뻔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둘은 일 년도 채 안 돼 이혼하게 됐습니다.


결혼은 파국을 맞았지만 의외로 그 후 둘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다시 연극배우로 돌아간 엘런은 큰 성공을 거둬서 당대를 대표하는 여배우가 됐습니다. 당연히 뛰어난 재능 덕분이었지만 와츠와 함께 살면서 문화계의 중요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덕도 많이 봤지요. 결혼도 두 번이나 더 했고, 아이들도 뒀고요. 와츠와 엘런은 때때로 우정 어린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와츠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과거는 모두 예전에 읽은 책 속 이야기로 남겨둡시다. 우리는 여전히 두 사람의 예술가로서, 아름다운 이미지를 꿈꿀 수 있습니다….”

와츠도 23년 뒤인 1886년 예순아홉 살의 나이로 재혼했습니다. 이번엔 나이 차이가 더 컸습니다. 아내인 메리가 와츠보다 서른두 살 어렸거든요. 이번에는 둘의 뜻이 잘 맞았고 결혼을 방해할 사람도 없어서 와츠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행복한 결혼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서툴지만 좋은 사람, 익숙한 감동을 전하다


와츠의 작품 세계는 이런 연애사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의 재능은 프레드릭 레이턴이나 존 에버렛 밀레이 같은 당대의 대가들에 비해 아주 살짝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화려함이나 세련미가 조금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요. 남들이 안 하는 시도를 이것저것 해서 때로는 “이게 뭐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걸작도 많았지만, 워낙 많은 시도를 하다 보니 거장이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한 작품도 많이 그렸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스타일은 유행과 거리가 좀 있었습니다. 성경이나 신화를 통해 인생의 교훈이나 신의 말씀을 전하던 과거 명화들과 달리, 당대의 유럽 화가들은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와츠는 여전히 그림을 통해 사랑이나 검약, 약자에 대한 배려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려 했지요. 본인부터가 “눈을 즐겁게 하는 작품보다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면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대한 생각을 전하는 게 내 작품의 의도”라고 대놓고 설명했을 정도입니다. 이는 확실히 좀 뻔한, ‘한물간 생각’이긴 했습니다. 당시 전통적인 스타일의 그림들 대부분이 냉혹한 비평을 받고 세상에서 잊힌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왓츠의 그림만큼은 예외였습니다. 그 비결 중 하나가 성실함입니다. 그는 한 가지 스타일이나 주제에 안주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거듭했습니다. 추상 회화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던 시절부터 추상적인 그림을 그린 게 단적인 예입니다. 이런 시도들은 후학들의 디딤돌이 돼서, 그의 추상화풍은 피카소의 그림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더 중요한 건 왓츠의 인품이 너무나도 훌륭했다는 점입니다. 화가는 작품은 물론이고 자기 삶으로도 그 작품에 담은 뜻을 증명해야 합니다. 예컨대 작품을 통해 줄기차게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던 작가가 사실은 갑질을 하거나 성추행을 저질렀다면, 그가 이때까지 만들었던 작품들은 모두 무가치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와츠는 자신의 성실함과 삶으로 작품 속에 담긴 메시지를 증명했습니다. 그는 항상 예술에 헌신하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고, 가난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왔으며, 자기 작품 대부분을 국가에 기증했습니다.

1904년 세상을 떠날 때 와츠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는 화가 중 하나였습니다. 한 귀족은 그에게 헌정하는 글에 이렇게 썼습니다. “불멸의 스승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친절한 최고의 남자.” 전 세계 언론들이 수백 개에 달하는 부고 기사를 썼고, 그 내용 대부분은 위인전에 가까운 칭찬이었습니다. 당시 기사들을 읽다 보면 “이렇게 착하고 친절하고 헌신적인 사람이 어딨어? 세상을 떠났다고 너무 칭찬만 한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잠깐 들 정도지만, 어떤 편지나 기록에서도 그의 인품에 대한 기록은 오직 칭찬뿐입니다.


화가의 삶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이런 사실은 은연중에 드러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마틴 루터 킹과 사회운동가 시절의 넬슨 만델라 같은 사람들도 이 ‘희망’을 보고 받은 감동을 통해 투쟁을 이어 나갔다고 하니까요. 세련미로 유명한 거장들에 비해 약간은 투박한 와츠의 그림들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좀 서툴어도 괜찮아. 희망을 품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노력하면 어떻게든 잘 풀리는 법이야. 내 사랑도, 내 작품도 그랬어.” 와츠의 그림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좀 뻔한, 그렇지만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충고를 조곤조곤 전하는 듯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i>*이번 기사는 G. F. Watts: The Last Great Victorian (Vernoica Franklin Gould 지음), G. F. Watts : Victorian Visionary (Mark Bills, Barbara Bryant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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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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